역사란 무엇인가 수업 리포트... 무진장 하기 싫더구만;;
조선 왕조는 중국 명나라와는 사대관계를 갖고 중화적 외교질서의 한 축이 되었지만. 일본과는 대등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새로운 교린관계를 구축했다.
이 교린관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통신사’이다. 대일 관계에서 ‘통신’의 이름을 단 사절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한 번 있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태종대까지는 일본에서 파견된 사절에 대한 답례사절로서 ‘회례사’ 또는 ‘보빙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신사란 명칭이 정착한 것은 세종대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앞서 보아온 송희경 회례사가 오에이노가이코의 전후 처리가 끝난 뒤 ‘신의로 통한다’라는 뜻에서 통신사라는 이름의 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세종대에는 3회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어 교린의 결실을 보였다.
1428년의 통신사는 아시카가씨의 4대 장군 요시모치의 사망을 조문하고, 새 장군 요시노리 후계 취임을 축하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교토에 들어온 박서생을 정사로 한 사절 일행을 장군 요시노리는 교토의 토지인에서 접견했다. 이와 같이 상대국의 주권자 교대나 경조사와 관련하여 외교사절이 일본에 건너가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제2회 통신사는 1439년에 파견되었다. 이때 일행은 장군의 집무관저인 무로마치다이에서 접대 받고 요시노리장군과 면담했다. 그리고 교토의 고잔을 유람하는 데 초대되었다. 제3회 통신사는 1443년에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6월, 변효문 정사 등은 가키츠노헨으로 모살된 요시노리의 죽음을 조문하고, 나이 어린 새 장군 요시카츠 후계자리 승계를 축하하는 사절이었다.
야스토미노키에 따르면 일행은 50기 정도의 규모로 ‘로지가쿠’를 연주하고 혹은 마상에서 악기를 불며, 피리 1명, 북 1명, 비파 1명, 정고 1명, 기타 나팔 2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소규모이면서 에도 시대의 통신사 행렬의 원형이 이때부터 보여진 것이라 짐작 된다.
이때에도 장군과의 면담은 무로마치테이에서 행해졌다. 그 이후 통신사의 파견은 세조대와 성종대에 3회 계획되어 서울을 출발했으나, 불행히도 세 번 모두 해난과 정사의 사고로 일본에 도착하지 못했다. 시대가 흘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기에도 2회에 걸쳐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1590년 히데요시가 대마 도주 소씨를 통해 조선 국왕의 입공을 요구한 데에 대해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천하일통을 축하하는 통신사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여 조선측을 설득함으로써 실현된 것이다.
1596년 에는 제 1회 침략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가고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교섭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명나라 사절을 후시미조에서 맞이했을 때, 조선 조정은 황신을 정사로 309명의 사절단을 명나라 사절의 뒤를 좇아 파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조선 사절과의 면회를 거부하여 일행은 사카이에서 체류한 뒤 귀국했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에서는 일본에 대한 교린관계의 상징으로 ‘통신사’라는 카드를 일관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이 파견한 사절은 그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측에서는 아시카가 장군으로부터 파견된 사절에 대해서는 일본이 중국 황제에게 ‘일본 국왕’으로 승인받은 직후부터 ‘일본국왕사’로 기록되었고 사신은 그와 같이 대우를 받았다. 1443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서장관이었다가 이후에 영의정에 오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에서는 ‘국왕사’와는 달리 하토야마, 호소카와, 시바, 오우치, 교고쿠, 야마나, 오토모, 쇼니씨 등은 ‘거추사’로 구별하여 접대사례를 정했다.
보통 구고앙사의 정사와 부사로 선정되는 사람은 교토 고잔 등의 승려들이었다. 한자와 한시문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박식했던 승려들이야말로 국왕사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왕사 파견에 필요한 비용은 종종 고잔 등에서 출자했다. 이것은 국왕사 파견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고려 대장경 등의 불전과 불구를 요청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덴류지, 겐닌지, 고야산 사이코지, 야마토 엔조지, 치쿠젠 묘라쿠지, 에치고 안코쿠지 등의 사원건물 개축 재원을 명목으로 무역의 이득을 얻고자 한 것에도 기인했다. 또 한 가지는 아직 해적행위가 끊이지 않은 해역을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 항로와 해적의 정황에 통달한 하카타 상인의 협력을 얻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제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국왕사를 17회나 파견했다. 모두 합하면 15세기 초부터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소 요시토시가 획책한 일본국왕사까지의 사이에 무려 60회의 일본국왕사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일본국왕사’의 명의는 아시카가 장군이 내리고, 사절과 비용 부담은 교토 고산 등의 대사찰이 부담하며, 목적은 불전, 불구의 요청과 무역의 이익을 노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를 통해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과 조선의 다채롭고 다양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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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교체제
야나가와 사건의 판결에서는 국서 개작이나 창작 행위는 처벌되었지만, 이 개작에 이르렀던 상황을 이에미츠나 막부 내각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일찍이 당사자였던 소 요시토시나 야나가와 시게노부, 도모나가, 게이테츠 겐소 등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는 점에서 진상파악이 곤란했던 것이다. 때문에 소 요시나리나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그 이상 사건의 진상을 추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작이나 바꿔 치기를 보고 묵과했던 예전의 집정가들에게도 누가 미치는 일은 피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건이 조선측에 자세히 알려지면 그 이후의 통교체제에 큰 장애가 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이에미츠도 도이 도시카츠, 사카이 다다카츠 등의 막부 각료도 모두 과거의 일은 과거로 돌리고 향후 댓조선 외교에 대한 방향을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도쿠가와 정권을 책임지는 사람들로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해 5월부터 10월에 걸쳐 향후 대조선 외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조루와 하야시 라잔, 히토미 에이키 등 유학자들, 그리고 교토 고잔 승려가 합석하여 자주 평의를 열었다.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이에미츠는 왕(王)자를 싫어했다. 그 이유는 정설이 없지만 숭경하는 이에야스의 국서를 위작하여 ‘일본 국왕’이라 칭해진 것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하야시 라잔과 히토미 에이키에게는 ‘쇼군 이라 하면 중국의 중대관에 지나지 않고, 또 조선 국왕과 호격으로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월의식도 있었기 때문에 난항을 거듭했던 것이다. 최후에는 도후쿠지의 승려 교쿠호코린의 제안으로 주역에 있는 ‘다이쿤’의 호칭을 일본 왕권을 대표하는 것으로 하여 조선 국왕이 부르게 하고, 자칭은 지금까지 막부 내각이 써왔던 일본국 미나모토보로 했다. 또한 ‘도토’를 쓰지 않고 ‘도후’로 하고, 조선 예조참의의 존칭은 ‘재상’을 쓰지 않고 ‘공’이라 하여 대마번주의 ‘공’과 대등한 것으로 했다.
그 다음 문제는 연호였다. 조선 국왕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는 사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해 왔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위조한 이에야스 국서는 별도로 하고, 히데타다 시대의 국서는 어느 것이든 당해 연호를 의미하는 용집밑에 간지를 쓴 것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일본 연호로 했다. 이 점은 훗날 제 1회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에도에서 이에미츠의 회답국서를 받았을 때 다이쿤호칭이 회답국서에 없었기 때문에 조선측으로부터 이의가 제기되어 논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고 있음’을 이유로 수정을 거절했다.
이 두 가지 점을 일본측이 실현하고 조서 측이 타협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중국 대륙에서 명 왕조가 부외 되고 새롭게 청왕조가 성립되어 조선은 청의 책봉을 받아 계족 중국 황제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할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 황제와의 책봉관계를 의미하는 ‘일본 국왕’ 호칭을 쓰지 않고 일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일본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따른 중화외교 질서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을 내외에 표명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역시 하나의 이웃나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관념이 그때부터 일본인에게 정착되어 갔다.
한편 조선도 남으로 천도한 명 왕조의 부흥이 절망적으로 되자 명 연호 사용을 그만두었지만 대신 청 연호를 쓰지 않고 용집간지를 사용하여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독립 자존의 나라임을 나타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국은 북방에서는 중화외교 질서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남방의 일본과는 형식상으로나 실질적으로 평등한 관계 즉 ‘대등항례’를 관철하는 교린관계를 갖고 독립국으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일간의 통신사 외교체제가 형성된 것은 또한 고대로부터의 중화외교 질서가 근대를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조일 외교를 전개함에서 막부는 새로운 외교체제를 만들어 나갔다. 막부는 교토의 고잔 승려 중 매년 2명을 ‘조선 수문직’ 또는 ‘대주수문직’으로서 대마번에 파견했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의 승려는 각각 혼잔 세키가쿠료의 일부로써 출장경비를 충당했기 때문에 이테이안 린반세키가쿠소라 불렸다. 이테이안이란 이들 승려가 대마부중에서 직무에 종사했던 암자의 이름이다. 지금까지 게이테츠 겐소와 기하쿠 겐포 등과 같이 소씨가 임명하거나 야나가와씨가 했던 것처럼 대마번에서 마음대로 조선과의 외교를 운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대마번 파견의 수문직은 막부내각이 임명하고 막부내각에 대하여 책임을 갖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윤번승은 조선사절의 일본 방문 때에는 반드시 에도까지의 왕복에 수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대마번이 대조선외교가 ‘가역’이었지만 이미 막부의 대리인이나 대행자가 아닌 현지의 실무담당자 겸 사절의 응접담당자로서 그 직무권한이 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국서 위조사건이 그 후 재발 하지 않았던 것은 조선 수문직의 설치효과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통신사의 부활과 닛코
야나가와 잇켄의 판결 이후, 소 요시나리는 막부에 기쇼몬을 내어 이에미츠 장군의 높은 은혜에 사의를 표하고 향후에는 “일본과 조선의 통교에 관한 일에는 막부의 뜻을 소중히 알아 모시고, 막부를 위하여 추호의 나쁜 일도 하지 않으며”, “일본 또는 조선에 어떤 숨기는 일이 없도록 힘쓸 것”을 맹세했따. 그리하여 곧 대마도로 돌아와서 조선 사절의 초청 준비에 착수했다.
1636년 2월 대마도는 슈헤이산판을 조선에 보내어 사절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측에서는 이사신 ‘통신사청래차왜’라 기록하고 있다. 다음 달 별도의 대마도 사신으로부터 이번 사절파견 요청은 “관백이 교린 성신의 엽를 알고자 한다”고 하며 대마도주를 통해 통신사를 청한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번 사절은 전회와 같이 이에미츠가 장군직을 승계했다고 하는 것처럼 특별한 축하의 뜻을 표하는 것도 아니다. 또 ‘일본 국왕’으로부터 국서가 도착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 시기에 북방의 후금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국경 부근의 사소한 충돌을 구실로 후금은 조선을 문책하고 위압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조선 조정은 과거 30년간 야나가와씨가 소씨를 제치고 조일 관계를 전담했던 것을 ‘국서 개작 폭로사건’의 처벌결과를 통보받고 알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측은 향후 소씨만이 창구일 뿐이므로 소씨의 외교 노력을 지지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이와 같은 남북방의 대외정세를 충분히 고려했던 인조는 국서 가운데 일본 왕권의 안정을 치하하는 ‘태평배가’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그래서 전란 후 네 번째 파견된 사절은 일본측 국서가 먼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회답사’가 아니었다. 또 피로인의 본국 대량 송환도 이 이상은 거의 바랄 수 없었으므로 대마번의 요청대로 명칭을 ‘통신사’라는 명칭이 대일 사절로서 정착되어 있고, 전후 처리를 마친 단계에서 원래대로 ‘통신사’로 되돌리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이로써 에도 시대 최초의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조선 사절 478명은 정사 임광 등 세 사신이 인솔하여 국서를 지참하고 일본에 건너갔다. 사신들은 대마도로부터 에도까지 가는 도중이나 에도 체류 중에 ‘국서 개작 폭로사건’을 둘러싸고 일본의 집정이나 여러 다이묘 간에 균열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앞서 언급한 이에미츠의 재판에 관해서 하야시 라잔등 이에미츠의 브레인들과 도이 도시카츠 등 로주의 일부는 공공연히 불만을 토로했고, 조선 사절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난제를 제기하여 소 요시나리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에미츠는 사절 일행에게 스루가의 쿠노산으로부터 닛코로 이전한 이에야스의 묘인 도쇼구를 유람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미츠로서는 이에야스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화려하게 창건된 종묘를 외국 사절에게 보여 도쿠가와 정권의 위상과 조상숭배의 모습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행은 전례가 없으며 일정에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사절이 이를 거절한 것이 정치문제화되어 설득을 맡았던 소 요시나리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미츠 역시 직접 초청이 거부된 것은 장군 가문의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세 사신은 협의를 거듭한 끝에 소씨가 이번에 사절 왕래의 책임자인 이상, 이 기회에 소 요시나리를 구해주기 위해서 닛코 유람을 승낙하기로 했다.
이상과 같은 곡절 끝에 12월 14일 길일을 택하여 국서전달 빙례가 에도조에서 거행되었다. 의식의 순서와 로주들의 영접장소 등은 전회보다 다소 정중하게 개선되었지만, 이런 사실은 바로 전날까지 이에미츠가 직접 진두지휘를 맡아 사절을 후대하고자 한 조치였다. 조선 국왕의 국서가 전달된 뒤 이에미츠는 로주들을 통해 일행이 추위에 먼 길에도 불구하고 국서를 전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만 아니라, 세 사신이 새롭게 조성된 닛코의 이에야스 묘소를 관람한 것은 “나라 전체의 관영이며 지대한 기쁨이요 행운이다”라는 말로 공식적인 사의를 표했다.
빙례가 끝난 뒤 회답국서와 함께 이에미츠로부터 조선 국왕에게 장군가문으로서는 처음으로 선물이 증정되었다. 선물은 ‘금전 20척, 은대자 2식, 내로부수병립수적제구, 비단옷 50령’이었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 통신사 내방 때마다 장군 가문에서는 다양한 선물을 조선 국왕에게 보냈다.
닛코에는 그 이후 통신사가 두 차례 더 방문했따. 1643년의 통신사는 출발 이전에 이에미츠의 요청을 받았다. 통신사는 이에야스 묘에 보낸 인조 국왕의 친필, 조선 예조참판의 명문이 씌어 있는 대동종, 오쿠노인 호토 앞에 안치할 삼구족등 선물을 증정하고 이에야스 묘 앞에서 제례를 행했다. 동종은 조선에서 동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마도산 동으로 주조되어 멀리 바닷길로 에도까지 운반되었다. 통신사 일행 중에는 독축관이 추가되고 본래의 하이덴과 가라몬 사이에 가리하이덴이 설치되어 그해 7월 이전에는 없었던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졌다. 제문은 물론 한국어로 낭독되었다.
1655ㄴ연에는 그 전해에 사망한 이에미츠의 묘소인 다이유인묘에도 제사가 집행되어 인조를 계승한 효종의 제문이 낭송되고 동등룡 한 쌍 등이 증정되었다..
1636sus 통신사의 방일은 그 이름에 걸맞게 일본과 조선의 선린우호 관계를 확고히 했다고 볼 수 있다. 설사 일본측에 우월의식이 있었다 치더라도 에도조에서의 빙례 방식이나 닛코 관람이나, 일본과 조선과의 교린관계를 공고히 한 것은 틀림이 없다. ‘국서 개작 폭로 사건’을 극복한 대마번의 소 요시나리도 또한 상황에 걸맞게 조선과의 외교를 잘 펴나가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대마도 역지 빙례
도쿠가와 장군의 직위승계를 축하하는 최후의 빙례, 그리고 일본 국내로 통신사가 방문한 최후의 1811년 행사는 그전까지의 빙례와는 다음의 점에서 크게 달랐다. 우선 11대 장군 이에나리의 승계 축하는 1787년 으로서, 그로부터 24년이 지나고 나서 행해진 빙례였다. 다음으로 빙례가 이루어진 장소는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대마도였다. 세 번째 통신사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총인원은 328명이었다. 이와 같은 시간 장소 규모의 변경은 주로 양국의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조선에서는 천재 때문에 대규모로 기민이 발생하고, 또한 양반 계층의 당쟁 격화와 기강 해이가 만성화되어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 공급이 달리는 일조차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 했다. 이에나리 장군의 취임 이전인 1783년의 흉작으로 시작된 소위 덴메이의 대기근발생으로, 구제를 바라고 전국적으로 농촌에서는 백성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에도, 오사카를 비롯한 대도시나 조카마치에서 쌀값이 폭등했고, 상인의 쌀 매점에 항의하는 폭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농촌에서 생활이 어려워져 도망친 노숙자들이 도시로 유입되어 대규모 소요를 벌였던 것이다. 이에나리 장군의 취임 직후에 고산쿄의 하나인 다야스 무네타케의 아들 무츠시라카와 번주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힛토로주에 등용된 것은 이러한 어수선한 사회의 불안을 조기에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막부 각료를 장악하고 있던 소바요닌 다누마 오키츠구를 추방하고 유통경제 재건을 위해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다. 또한 막부 재정의 대폭 긴 축을위한 정책을 연이어 내놓았다.
그 무렵 대마번도 극도의 재정 궁핍에 빠져있었다. 무엇보다도 번 재정의 명줄이었던 조선 무역이 18세기 후반에 들면서 극도로 부진에 빠졌다. 수출품인 은과 동은 일본 국내에서의 산출이 고갈되고, 다와라모노 라 불리던 해산물의 수출로 대신하는 상태였다. 수입 물품의 대표인 고려인삼도 조선국 내의 산출 부족에다 교호 때에 일본국내에서 인삼의 재배에 성공하여 그 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고, 또한 생사나 목면도 일본 국내생산이 궤도에 올라 수입 수요가 격감했다.
그 때문에 대마번은 조선 교역 쇠퇴의 보상으로 특별지원금을 막부에 신청하고, 그 하사금과 차입금으로 겨우 번의 재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이에나리 장군의 즉위 직후에 대마번은 통신사 초청 의견을 막부에 제출했다. 통신사 초청에 따르는 지원금을 일시에 차입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츠다이라 사다노부는 이 의견에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로주들은 연명하여 “교린성신의 참뜻으로 말하자면, 흉년 등의 모양 세를 드러내지 않고, 이것저것 끌어다 꾸미는 모습을 해서는 성신의 길에도 위배된다”고 하여 대마번에게 통신사 초청의 무기 연기를 교섭하도록 명령했다. 사다노부의 자서전 우게노 히코토에 의하면 “조선 사절이 가는 길에 일본의 성쇠를 보는 것은 이익이 되지 않는다”라고 했고, 통신사 왕래 중에 기근이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는 것도 두려워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막부도 각 번도 통신사 초청 같은 거액이 필요한 사업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기해야 했던 것이 진심이었다. 또 사다노부는 “원래 이 통신사가 일본에 오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모양이라고는 할 수 없고, 간혹 일본의 썩은 유생들이 모두 나와 계림인과 창화하고자 하는 것이 본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등으로 조선에 대한 멸시관을 언뜻 비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측은 전례 없는 일이라 하여 사절 파견 연기 교섭은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대마번이 설득을 거듭한 결과 겨우 조선측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만 1791년, 사다노부는 새삼스럽게 대마도에서의 빙례 거행을 제안하도록 명령했다.대마도에서의 빙례라는 생각은 일찍이 아라이 하쿠세키가 제안했던 것이다. 경비 절감과 대등한 관계를 철저히 하는 것이라면 양국의 중간 지점인 대마도가 적당하다는 의견이었다. 사다노부는 이에야스 이후로 장군도 10대를 헤아리고 있고, 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관례는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이 교섭도 예상대로 난항을 겪었다. 조선측은 일단 통신사 파견 연기에 합의하고 있었는데 다시 변경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데에다가 교활하면 절대 통악한 일”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대마번의 설득으로 누그러졌다. 이것이 1907년의 일이었다.
그 뒤 대마번 내의 내분과 교섭을 마무리 지으려고 대마도에 와 있던 조선의 역관을 뇌물로 공작한 것이 조선측에 알려져 사태는 다시 분규를 초래했다. 대마도에서의 빙례가 실행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난 1811년의 일이었다. 이때의 빙례 거행 개요는 다음과 같다.
-통신사의 규모는 300명, 사신은 정사와 부사2명으로 하고 ,사신의 선박도 4척에 그친다
-일본측은 4위 이상의 직위를 지닌 정사2명이 상사로서 대마도에 건너간다.
-빙례는 대마부중의 소 번주 저택에서 행하고, 의식은 에도조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집행한다.
-기타 행사들도 에도에서의 행사에 준한다.
-마상재 전악 급창 장창 의 시행은 폐지한다.
-상호 예물도 삭감한다.
이 대마도 역지 빙례를 위해 대마도 부중에는 통신사 일행이 묵을 객관의 신축, 소씨 저택이나 에도에서 오는 상사용 객관 등의 신개축, 도로나 항구의 정비 등에 약 12만 냥의 경비가 들어갔다. 에도로부터 오가사와라와 와키사카 두 상사와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 오메츠케, 간조부교 등 합계 2,799명이 대마도로 향했다. 이 인원수와는 별도로 화물선의 운항에 딸린 사공의 총인원은 이의 몇 배였다.
여기에 필요한 경비의 총액은 38만 3천 냥 남짓이었다[에키지힌레이고요 토도메] 종래 에도 빙례의 총비용은 메이레키때의 기록에 따르면 막부와 여러 다이묘를 통틀어 100만 냥이었던 것으로 보기 때문에 대강 그 40%에 미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피폐한 농민들에게 즉시 거둘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무라타카에 따라 할당된 부과금인 국역금은 5개년 분할 납세하도록 했다.
통신사의 대마도 체재 동안 에도로부터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 이외의 학자와 문인이 수행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소규모이면서도 통신사 일행과의 문화교류는 계속되었다.
어쨌든 최후의 통신사가 그때까지 조일간의 교량 역할을 해온 대마도 에선 선린관계의 결실을 거둔 것은 의의가 깊다.
그 뒤의 통신사 파견계획
1811년에 최후의 통신사를 대마도에서 맞은 뒤, 도쿠가와 정권은 다시 57년간 4대에 걸쳐 존속했다. 이 사이의 장군직 계승을 계기로 통신사의 방문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은 다양한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통신사를 맞이할 계획은 몇 번이나 시도되었다.
1837년 11대 장군 이에나리가 재위 50년으로 물러나고 세자 이에요시에게 직위를 물려주었다. 또한 새로운 장군 이에요시에게는 세자 이에사가가 있어 산고쇼가 동시에 생존하는 희귀한 태평시대라는 이유로, 막부 내각에서는 시기는 별도로 하더라도 조선에서 통신사를 맞는 것이 좋겟다는 의견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 사이 에도조 니시마루의 화재 등도 있어, 시기는 차이가 나지만 대마번주에게 1844년에 통신사를 맞도록 조선측과 교섭하라는 막부의 명령이 내려졌다.
대마번에서는 조속히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내 동래부사와 교섭했지만, 조선측에서는 3년뒤의 통신사 파견은 재정상 곤란하다고 하여 1846년의 파견을 제안하고 이것으로 일단 교섭은 타결되었다.
그러나 1841년에 오고쇼 이에나리가 죽어 ‘산고쇼 병립’의 상황이 소멸되었다. 오고쇼 이에나리 사망후, 막부 내각은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실권을 장악하고 이른바 ‘덴포의 개혁’을 추진했따. 미즈노 다다쿠니는 통신사 방문에 대해, 분카 때의 대마도 빙례는 목적했던 경비 절감이 어정쩡했다는 점에서, 대마도까지의 상사 파견에 필요한 경비 절감을 노리고 오사카에의 빙례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서는 미즈노가 통신사의 오사카 빙례를 실현시킴으로써 여러 다이묘에 대한 통제와 막부 권위의 과시를 꾀하기 위해 제안했다는 학설도 있다. 대마번은 조선측의 동의를 얻느냐 못얻느냐에 대해서 자신은 없었지만 어쨌든 조선측과 교섭했는데, 조선측은 대마도에서의 빙례를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바꾼 대가로 빙례를 10년 뒤로 미루어 1856년에 실행한다는 안을 제의해 왔다. 이에 대마번은 크게 당황했지만, 이 사이 1843년에 미즈노 로주가 파면되었기 때문에 결국 미즈노의 오사카 빙례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이때 가장 곤란했던 측은 대마번으로, 통신사 초청을 핑계삼은 특별지원금의 지급이 끊겨버려 번 재정의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막부 내각은 조선측의 의향을 받아들여 1856년 오사카에서의 빙례에 동의했는데, 연기의 대가로서 대마번은 1만 5천 냥의 대부금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다시 교섭하여 1861년에 실시하기로 개정했는데, 이대로 아무 일이 없었다면 1861년에는 이에요시 즉위 경사를 축하하는 통신사를 맞게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1853년 6월 이에요시가 사망했다. 또 그 전년 에도조 니시마루의 화재 등도 있어 즉시 통신사 초빙이라는 분위기는 무르익지 않았다. 이에요시는 어려서 요절한 7대 이에츠구 장군에 이어서 사상 두 번째로 조선통신사를 맞지 못한 장군이 되어버렸따. 그 뒤를 이은 13년 이에사다 장군의 즉위 축하를 우해 통신사 초빙 교섭이 다시 이루어졌다. 이때 막부 내각과 대마번의 은밀한 합의 아래 대마번의 재정 구제를 위해, 다시 대마도에서의 빙례 거행을 꾀하여 조선측의 이해를 얻기도 했다. 교섭 결과 또다시 5년이 연기되어, 1866년 대마도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사이에 조선측이 연기에 다시 연기를 쉽게 동의했던 것은 조선측도 내정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었고, 조정의 권위도 저하되는 속 사정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1853년 미국 함대에 의한 개국 강요를 비롯한 외환이 연이어 일어났고,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을 조선을 사절을 맞아 빙례를 거행할 여유가 전혀 없다시피 한 형편이었따.그럼에도 불구하고 1858년, 병약한 13대 장군 이에사다가죽고 이에모치를 기슈가에서 제 14대 장군으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다시 조선측과 협의한 겨로가 애초의 1866년에서 다시 연기하여 1876년의 실시로 14대 이에모치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통신사를 맞기도 했다.
이 병례 계획은 말할 필요도 없이 도쿠가와 정권의 와해로 물거품이 되었따. 그러나 양국의 정권이 레임덕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또 전례를 존중한다는 소극적 입장이면서도, 형식상으로나마 선린관계를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또 한가지는 도쿠가와 장군가의 경조를 위해 대마도로 조선의 역관사가 내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관사는 정보수집의 목적도 있었지만, 대마번주 소가의 경조, 에도 참근으로 부터의 귀도 위문, 통신사 파견을 위한 예비교섭을 위해 자주 대마도에 왔따. 대마번도 또한 조선 왕가의 경조를 비롯해 갖가지 실무 교섭을 위해 에도 시대 전시기를 통해 부산 북부 교외에 있던 동래부로 사절을 파견했다. 1811년 최후의 통신사가 방일한 뒤에도 도쿠가와 장군가의 경조 때마다 이런 사명을 띤 역관사가 대마도에 갔던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최후의 장군인 요시노부 때였따. 결국 통신사가 끊긴 후에도 대마번이 중앙정권의 대행자로서 조일 양국 외교의 한 면을 계속 수행했다고 할 수있다.
느낀점
조선 통신사를 바라보는 한 일 양국의 시각 차이는 꽤 크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통신사를 미개한 일본에 우월한 문화를 전해준'은인'이자 '구세주'로 여기고 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막부에 공물을 바치러 온 '조공사'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현실 이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일본사행은 일본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사행원들은 일본 각지의 문인들과 유학이나 한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시를 지어주고 받는 등의 교류를 가졌다.통신사가 머문 객관과 사찰등의 건축공간과 유적 유품등은 세계적인 문화 자산이다. 따라서 '조선통신사 길'의 한일 공동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그 당위성을 뛰어넘는 '필연적'인 일이다.
지난해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지 400년이 되는 해로 뜻 깊은 행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조선통신사는 200여 년에 걸쳐 한일 두 나라에 성신교린의 평화시대를 열게 하고, 무엇보다 문화교류가 두드러진 것 같다. 조선통신사의 위상과 인식에 대한 새 바람도 일게 하였다.
조선통신사의 행렬 은 대단한 문화이벤트였다. 서울과 일본 에도를 잇는 '통신사의 길'은 한마디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길이었다. 두 나라 육로와 해로에 걸친 그 길은 얼마나 멀고 드라마틱 한가. 통신사가 머문 사찰과 객관 등의 건축물, 성곽과 거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았다. 통신사가 남긴 시문, 춤과 노래는 수세기가 지난 지금 더 찬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조선통신사 길'의 한일 공동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특징되는 한일 두 나라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17~19세기 평화시대를 열었던 조선통신사 길 또한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와 함께 오늘의 한일 두 나라 우호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 통신사 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노력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됬다고한다. 일본의 공동 등제제안이 우리에게 일말의 당혹감을 안겨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통신사 관련 유적과 건물은 일본이 훨씬 더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 열의도 그들이 앞서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한것이 현실이다.
'조선통신사 길'의 한일 공동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바람직하다면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할것이다. 정부차원의 정책적 배려는 물론, 학계의 연구와 지방자치단체의 유적 유물 발굴과 복원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일본에 조선통신사 관련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도 건축미가 빼어난 청녕헌등 옛 객사 건물과 유적 유품들이 적지 않다. 조선통신사의 국내 사행로, 서울 종묘에서 부산 영가대에 이르는 문화 실크로드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시급한것 같다. 선신교린의 조선 통신사 정신이 오늘의 한일 두 나라를 긴밀하게 묶어 또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을 창출했으면 한다.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남아 있지만, 민간에서는 서로의 문화와 풍습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이해하는 진정한 교류를 계속 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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